A
근대 이전의 국제 관계와 대외 교류 · 10한사1-02-01 · 3문항
문제 110한사1-02-01객관식
다음 자료에 나타난 서희의 외교 논리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 회담하니, 손녕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거란) 것이다.' 서희가 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고구려를 계승했으므로 나라 이름도 고려라 했다. ⋯ 여진이 길을 막아 송과 통하기 어려울 뿐이니, 여진을 쫓아낸다면 어찌 통하지 않으리오.'
— 『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서희는 우리나라가 고구려를 계승했으므로 나라 이름도 고려라 했다고 답하여, '고려는 신라를 이었으니 고구려 옛 땅은 거란 것'이라는 소손녕의 주장을 정면으로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여진을 쫓아내 길을 열면 통교할 수 있다'는 약속을 대가로 강동 6주(993)를 확보했습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이 담판보다 26년 뒤인 1019년의 일이고, 송군의 개입은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강동 6주는 넘겨준 땅이 아니라 얻어 낸 땅이므로 나머지 선택지는 자료와 맞지 않습니다.
문제 210한사1-02-01객관식
조공·책봉 체제를 실용 외교로 보는 관점이 그 근거로 드는 사실은 무엇인가요?
본문은 이 문제를 사대 비판론과 실용 외교론이라는 두 입장으로 나란히 제시합니다. 실용 외교론은 첫째 조공품의 몇 배에 달하는 회사품(回賜品)을 받아 사실상 무역 흑자를 누렸고, 둘째 책봉을 정통성·외교 자산으로 활용했으며, 셋째 내정·법제·왕위 계승은 자율적으로 운영했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나머지 세 선택지는 모두 사대 비판론이 드는 근거로, 같은 제도를 반대편에서 바라본 서술입니다.
문제 310한사1-02-01OX 판단
다음 설명은 옳을까요?
고려의 원 간섭기는 정동행성·다루가치를 통해 내정 간섭을 받은 시기였지만, 동시에 색목인 관료와 페르시아 상인이 개경을 오가고 고려의 문물이 원을 거쳐 서역까지 전해진 시기이기도 하였다.
옳습니다. 본문은 원의 간섭만 강조하는 것은 일면적이다라고 하면서, 원 간섭기가 동시에 한반도가 가장 넓은 세계와 연결된 시기였다고 설명합니다. 정동행성·다루가치의 내정 간섭과 공녀 진공 같은 굴욕이 분명히 있었지만, 색목인 관료·위구르 환관·페르시아 상인이 개경을 오갔고 소주·만두·족두리 같은 흔적도 이때 남았습니다. 한 시기를 '굴욕'과 '세계화' 어느 한쪽으로만 재단하지 않는 것이 이 단원의 관점입니다.
B
수취 체제와 경제생활 · 10한사1-02-02 · 3문항
문제 410한사1-02-02객관식
다음 자료의 제도가 경기도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대되기까지 100년이 걸린 까닭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대동법은 토지에 부과되는 세이니, 토지가 없는 자는 부담이 없고, 토지가 많은 자는 부담이 많다. ⋯ 가난한 자가 보다 살 만하게 되고, 부유한 자가 그 빠진 부담을 메우니, 이것이 균평(均平)의 이치이다.
— 이원익·김육 등의 대동법 옹호 상소 종합
대동법의 핵심은 '호별 부담'에서 '토지별 부담'으로의 전환입니다. 토지가 적은 농민에게는 큰 혜택이었지만 토지가 많은 양반·지주에게는 부담 증가였고, 본문은 이것이 양반들이 100년에 걸쳐 시행을 반대한 이유라고 못 박습니다. 방납업자가 밀려난 것은 대동법이 낳은 결과이지 지연의 원인이 아니고, 농민은 오히려 방납 폐단에 시달렸으며, 결작은 대동법이 아니라 균역법(1750)의 재원 보충책이므로 나머지는 맞지 않습니다.
문제 510한사1-02-02객관식
정부가 '소(所)'를 '현(縣)'으로 승격시킨 조치가 보여 주는 것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공주의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망소이가 무리를 모아 봉기하니, 정부가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켰다.
— 『고려사』 권19, 명종 6년(1176)
향·소·부곡의 주민은 일반 군현보다 세 부담이 무겁고 거주·이주의 자유도 제한되었습니다. 정부가 봉기를 달래려고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킨 것은, 본문의 표현대로 차별적 신분 부담을 인정한 셈이며 봉기의 원인이 신분제적 수취에 있음을 정부 스스로 인정한 일입니다. 토지가 모자라 지급 대상을 현직 관료로 좁힌 것은 경정전시과(1076)의 내용이고,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신진 사대부에게 재분배한 것은 조선 건국 직전의 과전법(1391)이며, 향·소·부곡은 새로 설치되기는커녕 조선 초까지 점차 해체되어 일반 군현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문제 610한사1-02-02분류
조선 후기의 세 개혁이 각각 어떤 부담을 손본 것인지 알맞은 칸에 넣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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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田) 개혁
공납(貢) 개혁
군역(役) 개혁
세 개혁은 각각 다른 세목을 겨냥했습니다. 영정법(1635)은 전세를 1결당 4~6두로 고정한 전세 개혁인데, 본문은 세종의 연분 9등법이 관리들의 등급 매김이 자의적이고 번거로워 16세기 이후 최저 등급으로 거두는 관행이 굳어졌다고 하면서 영정법을 이 관행을 공식화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대동법(1608~1708)은 호별 특산물 공납을 토지 기준 미곡 12두로 바꾼 공납 개혁으로, 선혜청이 받은 미곡으로 공인이 물품을 사들이게 되면서 상업·수공업 발달을 이끌었습니다. 균역법(1750)은 군포를 절반으로 줄이고 그 부족분을 결작·선무군관포·어염세로 메운 군역 개혁입니다.
C
신분제와 사회 구조 · 10한사1-02-03 · 3문항
문제 710한사1-02-03객관식
이 자료를 근거로, 신라 말 6두품 지식인들이 새 왕조 건설에 가담한 까닭을 설명한 것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6두품 이하는 비록 큰 재주가 있어도 17관등 중 6관등 이상에 오를 수 없으니, 이를 '족강(族降)'이라 한다. 그러므로 글솜씨와 학문이 뛰어난 자들도 늘 분개하며 한탄하였다.
— 『삼국사기』 · 최치원 「격황소서」 등 종합
6두품은 진골 다음가는 귀족이었지만 17관등 가운데 6관등(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최치원·최승우·최언위가 당의 빈공과에 급제할 만큼 학식이 뛰어났는데도 그 벽을 넘지 못해, 최승우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최언위는 고려의 왕건에게 가담했다고 설명하며 6두품의 좌절은 신라 멸망의 정치적 원인이 되었다고 정리합니다. 성골 소멸은 무열왕 이후 진골이 왕위를 차지한 사정이고, 음서제와 과거제는 고려에 가서야 생긴 제도이므로 이 자료와 관계가 없습니다.
문제 810한사1-02-03객관식
고려의 신분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고려는 법제적으로 모든 백성을 양인과 천인으로만 나누는 양천제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문벌 귀족, 중류층(향리·서리·기술관), 양인 농민(백정), 향·소·부곡민, 천민·노비의 여러 층으로 분화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이 고려 신분제의 특징을 법-실제의 괴리로 정리한 이유입니다. ①은 신라 골품제(흥덕왕 교서)의 규제이고, ②는 사실과 반대로 향·소·부곡민은 부담이 더 무겁고 이주도 제한되었으며, ③의 네 신분은 조선에서 법제가 아니라 실제 관행으로 굳어진 반상제의 모습입니다.
문제 910한사1-02-03OX 판단
다음 설명은 옳을까요?
대구부 호적에서 양반 호의 비중이 1690년 9.2%에서 1858년 70.3%로 늘어난 것은, 조선 후기에 실제 권력 구조까지 평등해졌음을 보여 준다.
틀립니다. 본문은 이 통계를 신분제 동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로 소개하면서도, 실제 사회 권력 구조의 변동인지, 아니면 호적상의 형식적 변화일 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고 덧붙입니다. 오늘날 학계는 양반의 희소가치와 권위가 약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지주제와 정치 권력은 여전히 일부 가문이 독점했다고 평가합니다. 공명첩·납속책이 만들어 낸 것은 '호적상의 급변'이며, 그것이 곧 평등은 아닙니다.
D
사상과 문화 · 10한사1-02-04 · 2문항
문제 1010한사1-02-04객관식
본문은 다음 논쟁을 단순한 형이상학적 논쟁이 아니다라고 평가합니다. 그 까닭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사단(四端, 측은·수오·사양·시비)은 이(理)의 발(發)이요,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發)이다." (이황)
"이가 발하면 기가 따르고, 기가 발하면 이가 그것을 탄다." (이이)
— 이황·이이의 사단칠정 논쟁
본문은 이황의 이기호발(理氣互發)과 이이의 기발이승(氣發理乘)이 도덕의 절대성과 현실의 가변성 사이의 입장 차이이자,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동인과 서인의 정치적 분기로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철학 논쟁이 곧 정치 노선의 갈림길이 된 것이 이 논쟁을 '단순한 형이상학'으로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본문은 실학을 17~18세기에 형식주의에 빠진 성리학을 비판하며 등장한 새 흐름으로 설명할 뿐 실학이 통치 이념의 자리를 대신했다고 하지 않고, 이 논쟁 때문에 과거 시험 과목이 바뀌었다는 서술도 없으며, 여러 종파의 대립을 일심(一心)으로 화해시키려 한 것은 통일 신라 원효의 화쟁 사상이므로 나머지는 맞지 않습니다.
문제 1110한사1-02-04객관식
다음과 같은 주장이 속하는 실학의 갈래는 무엇인가요?
수레와 배를 늘리면 상업이 번성하고, 상업이 번성하면 민생이 풍요로워진다.
— 박제가
박제가는 박지원·홍대용과 함께 이용후생을 내세운 중상학파(북학파)로, 청의 신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을 폈습니다. 수레와 배, 곧 유통 수단을 늘려 상업을 키우자는 주장이 그 전형입니다. 경세치용은 유형원·이익·정약용처럼 토지·세제 개혁을 앞세운 중농 계열이고, 실사구시는 김정희·안정복 등이 고증으로 옛것을 밝힌 국학 계열이며, 예학은 실학이 아니라 17세기 호란 이후 성리학이 정교화된 흐름(현종대 예송 논쟁)입니다.
E
주제 탐구 — 근대 이전 한국사 · 10한사1-02-05 · 2문항
문제 1210한사1-02-05객관식
본문이 말하는 좋은 탐구 질문에 가장 가까운 것은?
본문은 좋은 탐구 질문의 조건으로 첫째 명확할 것, 둘째 다양한 답이 가능할 것, 셋째 자료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을 들고, 사전을 찾으면 답이 나오는 물음은 탐구 주제로 부적합하다고 했습니다. ①~③은 연도나 글자 수처럼 사실 하나를 확인하면 끝나는 물음입니다. 반면 ④는 여러 갈래의 답이 가능하고 자료도 충분해, 본문이 직접 좋은 탐구 주제의 예로 든 물음입니다.
문제 1310한사1-02-05객관식
'조선의 신분제는 어떻게 흔들렸는가'를 탐구하려고 자료를 모았습니다. 본문의 기준에서 1차 사료에 해당하는 것은?
본문은 1차 사료를 당시의 기록(『조선왕조실록』·『고려사』·민정문서·금석문·일기·문집·고문서)으로, 2차 사료를 후대의 연구·기록(학술 논문·전공 서적·박물관 도록)으로 나눕니다. 노비종모법(1731)을 전하는 『영조실록』 기사는 당대의 공식 기록이므로 1차 사료입니다. 나머지 셋은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2차 사료이며, 특히 대구부 호적 분석은 1938년의 연구라는 점에서 호적 원본 자체와 구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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